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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괴한 욕망이 낳은 엽기 살인, 이동식 사건
    Dung--[엽기세상] 2015. 2. 26. 13:12

    언젠가부터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심심찮게 그 단어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대중매체에서 사이코패스들이 주를 이루는 엽기범죄행각을 드라마와 영화로 각색시켜 방영했고 이제 '엽기 살인, 사이코 범죄행각'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흔한 소재가 되어버렸다. 유영철과 강호순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사이코패스 엽기 범죄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데(나도 그런 줄 알았다) 오래 전 심리학 수업 과제를 준비하던 도중에 80년대에 일어났던 희한한 살인사건의 존재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일명 '사진작가 죽음 연출 엽기 살인'. 돈과 치정, 복수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이 아닌 오직 살인 그 자체

     

    에만 목적을 두고 이토록 잔인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고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사이코패스 범죄 행각과 흡사하여 모골이 송연해졌다. 심지어 이 사건이 오래 전 83년도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충격적이다. 당시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던 정권과 상류층의 제지 때문에(이런 엽기적 범죄가 나라의 위신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이러한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잘 기억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우리 이모에게 물었더니 기억하지 못 하더라.) 오히려 이 사건은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일찍부터 문화를 개방하여 선진화를 이룩한 일본에서는 상식을 초월하는 엽기범죄가 빈번하게 벌어졌는데, 이 사진작가 죽음 연출 사건은 오히려 한국형 범죄(생계형, 혹은 반사회적 범죄)보단 일본형 범죄(선진국형 쾌락 범죄)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당시 도서관 자료를 쥐잡듯 뒤지며 한국의 연쇄살인을 다룬 책들을 독파하기 시작했고, 채워지지 않는 의문과 사건현장을 찍었던 사진 등은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뒤져 살펴보았다.

    오랜만에 생각난 김에 이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겠다. 워낙 유명한 사건인지라 인터넷에서도 사건관련 개요와 당시 사진자료들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2012년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고 하던데 보진 못했다.

     

     

     

     

     

    범인은 43세 나이의 이동식이라는 남자였다. 직업은 보일러 배관 수리공. 하지만 특이사항이 있었다면 그는 과거에 수차례나 사진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82년도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에 가입했고 한 공모전에는 닭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은상을 수상하며 '독보적인 기괴함을 낳는 작가'라는 호평도 얻었다.

    피와 고문, 죽음, 그리고 성.

    그의 사진 세계는 이렇게 압축할 수 있었는데, 특히 그는 일본의 여성누드화보집에 심취하여 그 후로는 주로 여성의 나체를 담은 사진을 찍었다. 후에 압수된 그의 작품 사진들은 모두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들 일색이었다는데, 대표적으로 목이 졸려 죽어가는 여성, 밧줄에 묶여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 가슴에 과도가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성 등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적욕망을 다룬 사진들이었다고 한다.

     

     

     

     

     

     

    이동식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 번째 아내는 무슨 이유에선지 실종처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동식이 훗날 엽기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을 때 첫 번째 아내의 가족들은 이동식이 자신의 딸을 죽인 거라며 수사를 요청했지만 특별한 물증이 나오지 않아 결국 흐지부지 종결되고 말았다. 끝내 전처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동식은 두 번째 아내를 모델로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의 이미지는 모두 변태적인 성욕과 죽음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었다. 아내의 음모를 모두 밀어버리고 성기에 이물질을 삽입한 사진 등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함과 변태성을 담은 그 사진들은 이동식의 처형 직후 모두 프랑스와 일본 등 해외의 사진전에 비싼값으로 팔렸다고 하던데... 도저히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인간의 은밀하고 추잡한 욕구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좀 더 획기적인 사진을 찍고 싶었던 이동식은 단순한 죽음 연출 기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실제 살인을 저지르기로 마음먹는다. 희생자를 골라내어 그를 독살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던 것이다. 실제로도 이동식은 검거 직후 왜 그랬느냐는 형사들과 기자들의 질타에 "내가 저지른 것은 살인이 아니다. 나는 예술을 부활시킨 것이다."라고 떳떳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비뚤어진 내면 속에는 죽음과 살인을 향한 갈망과 동경, 가학적 페티시즘이 병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희생자로 골라낸 여자는 자신이 단골로 드나들던 퇴폐이발소의 여종업원 김경희씨. (당시 나이 24세) 그당시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했었다는 그 퇴폐 이발소는 '퇴폐'라는 단어에 걸맞게 온갖 성적행위가 자행되던 불법영업소였다. 이동식은 이곳에서 근무하던 김씨에게 "돈을 많이 벌면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인데 몸매가 참 예쁘다. 내 사진의 모델이 되면 유명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유혹했다. 솔깃해진 김씨는 이동식의 제안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것이 결국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1982년 12월 14일. 이동식은 김씨를 구로구 시흥동(현재의 금천구)에 위치한 호암산으로 데리고 갔다. 감기기운이 있는 김씨를 달래는 척 캡슐 안에 들어있는 청산가리를 감기약으로 속여 복용하게 했고 그 약을 받아 먹은 김씨는 고통 속에서 몸을 뒤틀고 눈을 뒤집어 깐 채 비참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죽음이 천천히 진행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여 이동식은 21장의 사진을 남겼다. 낙엽더미에 누워 고통에 얼굴을 일그리는 여자.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여자.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여자. 결국 눈을 뒤집어깐 채 숨 진 여자의 두 손을 결박하고 옷을 모두 벗긴 채 그는 몇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이것이 문제의 그 사진인데, 왼쪽에서 두 장은 죽기 직전에 아직 살아있는 상태의 사진, 그 이후부터는(손을 결박한 상태) 죽어 있는 상태의 사진이라고 한다. 초상권 침해니 인권유린이니 말이 많은 요즘 같은 인권사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 이 사진을 입수한 잡지사의 어이없는 실수로 인해 죽은 김모씨의 신상과 실제 살인장면을 담은 사진은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가 되고 말았다. 다시 회수하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린 후였다. 그로 인해 이동식 사건이라 검색만 하면, 현재까지도 어렵지 않게 피해자 김모씨의 사진을 찾아낼 수 있다.

     

     

     

     

     

    검거 직후 이동식은 연인이 된 김씨가 자신의 처에게 우리의 관계를 폭로할 것이라 협박한 것에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다 고백했지만, 벽장에서 발견된 그의 수첩 한권으로 인해 이 엽기적 살인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수첩 안의 글들은 이동식 혼자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와 상징적 은유로 가득해서 이것을 해석하는데 경찰들이 꽤 많은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는 어딘가 이상해보이는 사람이었다고 당시의 수사반장은 그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이동식은 베트남전에도 출전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가 매일 지니고 다니던 열쇠고리에는 사람의 장기, 혹은 동물의 뼈로 추정되는 이상한 물체가 달려 있었다. 이동식은 자랑스레 그것을 내보이며 "이 덕에 내가 베트남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하는 등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더구나 그의 수첩 속에 쓰여진 일기에서는 피해자인 김모씨 이외에도 다른 여성들의 행방을 암시하는 것들이 있었다고 하던데 결정적 증거가 부족했기에 결국 김모씨 살인에 대한 죄만 적용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실종된 그의 전처 가족들도 이동식이 그녀를 죽인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이동식 주변에서 행방을 감추거나 행적이 묘연해진 여자들의 수가 무려 21명에 달했는데 그들의 실종과 이동식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지 그것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이동식도 추가 범행에 대해 시인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추가 범죄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막 시작될 즈음 이러한 사건이 해외언론에 알려지면 한국의 이미지만 추락시킬 뿐이라고 판단한 국가에 의해 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만약 그 여자들을 모두 이동식이 죽인 거라는 증거가 포착됐다면 그는 유영철 이전에 발생한 희대의 사이코패스 범죄자로 기록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동식은 사이코패스인가, 그렇지 않은가.

    후에 '사이코패스'라는 의학용어가 새롭게 알려지고 난 이후부터 이 점이 늘 화두에 올랐었다 하던데 당시 이동식의 수사를 맡았던 한 수사지도관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흔히 그를 사이코패스 범죄의 효시라고 하는 이야기가 많던데 그는 거짓말에 탁월한 중범죄자였을 뿐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그렇지만 살인조차도 마치 무대 위의 공연이나 영화처럼 하나의 극적인 연출과 예술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 그런 욕망의 페티쉬에 극도로 집착하는 사이코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점 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전무후무한 엽기적인 범죄.

     

    결국 이동식은 검거된지 몇년 지나지 않아 속전속결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6년 5월에 형 집행을 당해 영원히 세상에서 격리되었다.

     

     

    "사람이 죽는 순간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숭고한 시간이며, 이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다."

    - 이동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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