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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Dung--[세기의전쟁] 2015. 2. 26. 18:11
프랑스를 전장(戰場)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다.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家)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宗主權)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1차 백년전쟁
백년전쟁은 1339년 플랑드르와 북(北)프랑스에서 양국군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黑太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이듬해 크레시전투에서 장궁대(長弓隊)를 활용하여 전력(戰力)이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騎士軍)을 격파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칼레시(市)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1347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뒤 양국에 페스트가 유행한 데다 재정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355년 흑태자는 다시 남프랑스를 침입하였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거둔 영국군의 일방적 승리는, 독립적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주력으로 한 보병(步兵)의 장궁대 전법(戰法)이 프랑스의 봉건 기사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참화와 영국군의 약탈로 농민의 피폐가 격심하여, 1358년 농민반란인 자크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는 매우 심한 궁지에 빠졌다. 그 결과 양국 사이에 브레티니화약(和約)이 성립되어,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시(市) 등의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하였다.
2차 백년전쟁
1364년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정(內政)의 정비와 재정(財政)의 재건에 착수하였으며, 아키텐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에 반항하게 하였으므로, 양국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 흑태자의 아우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하였으나 프랑스군의 분전으로 패배하고, 영국 해군(海軍)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전하였다. 따라서 브레티니화약에서 영국에 할양한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1375년 부뤼지(Bruges)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1377년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도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왕이 모두 미성년(未成年)이었으며, 특히 영국에서는 1381년 와트타일러의 난이 일어난 데다가, 더욱이 리처드왕의 지배에 대한 귀족의 반항까지 겹쳤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1399년 영국에서는 리처드왕이 폐위되고 랭커스터가(家)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精神錯亂)을 일으키는 샤를 6세를 대신하여 국정(國政)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란 상태에 빠졌다.
3차 백년전쟁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內紛)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14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를 진공(進攻), 아쟁쿠르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대패시켜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하였다. 헨리 5세는 이를 배경으로 1420년 트루아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그러나 샤를 6세의 황태자 샤를(샤를 7세)과 이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이와 같은 영국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으므로,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전황을 승전(勝戰)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바로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다. 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의 영국군을 격파하였으며, 그뒤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그 결과 그 해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하고 적법(適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샤를 6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조약은 사실상 그 뜻을 상실하였다. 그 다음해인 1430년에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으로 인도된 끝에, 1431년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435년 동안이나 항쟁을 계속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툴에서 휴전(休戰)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내에 멘 ·보르도 ·칼레 ·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백년전쟁 종결
1445년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히 타결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패전으로 영국에서는 랭커스터왕가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家)의 반항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와 같은 영국 내의 혼란을 틈타 기옌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4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인 보르도시를 맹공격, 이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의 승리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反英感情)이 고조된 점과,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 ·포병(砲兵)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國王軍)이 강화되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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