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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의 정복전쟁Dung--[세기의전쟁] 2015. 2. 24. 13:33
앗시리아는 포악하기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다들 전멸전, 섬멸전의 전쟁기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미지죠. 그런데 그것은 웃기게도 학계의 연구결과와 상반되는 결과입니다-_-; 학계의 연구결과는 그시대 치고는 매우 정교한 통치체계를 가지고 나름 너그럽게 통치했던 국가라고 나오걸랑요.; 다만 문젠 이거죠. 영토가 가장 넓었던 앗슈르반니팔 왕 때의 앗시리아가 너무 일반화가 되었다는 것입죠. 하지만 앗슈르반니팔 왕은 앗시리아 역사에서 이례적인 시기입니다. 오히려 멸망을 부추겼던 시기라고 보고요. 그런 면에서 앗시리아에 대한 잡설을 펴겠습니다.
앗시리아라는 국가 자체는 꽤나 오래전부터 있었던 국가입니다. 갑자기 뿅하고 나타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죠. 다만 그들의 활동을 보면 과거에는 정복보다는 상업활동으로 더더욱 주목을 받았던 국가입니다-_-;; 앗시리아가 아나톨리아에 만든 카룸-카네쉬라는 경제 식민지가 발굴되었기 때문이죠. 거기서 대량의 유물이 나왔는데 초보적인 주식 시스템이라고도 볼 수 있는 공통투자의 개념까지 있었습니다; 상인들이 공동 투자해서 아나톨리아까지 원정대를 보낸 것이죠;; 이것만 봐도 기존의 이미지하고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앗시리아의 역사적 전개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고대 오리엔트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중 하나인 기원전 12세기의 대몰락이죠. 보통 바다의 민족들로 유명한 그 사건인데. 사실 바다의 민족들은 유명세에 비해서 지지도가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특히 그 민족이 그리스에서 출발한 민족들이 완전 깽판을 쳤다는 것의 지지는 더더욱 낮아지고요. 민족이동을 말하더라도 그리스-트로이에서 시작한 연쇄적인 작용으로 말하기도 하니까요. 또한 바다의 민족이란 명칭 부터가 이집트의 한 벽화에만 나오는 것인데 이것 마저도 이집트가 가나안을 공격한 것을 공격당한 것 처럼 구라깐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정도니까요;; 이런 전통적인 시각은 헬레니즘 이후 이집트 역사를 집대성한 그리스인들이 과장한 면도 꽤나 있습니다. 바다의 민족들=그리스인이라고 그리스인 킹왕짱이라는 것이죠. 뭐 바다의 민족들과 그리스인의 연결관계를 완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확실한 정보가 너무 널리 퍼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여튼 이러한 기원전 12세기의 대격변으로 중동의 국가들은 모조리 다 몰락을 합니다. 여기서 앗시리아의 변화가 시작되죠. 앗시리아는 이 대격변에서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입은 것으로 추정되고, 때문에 회복이 훨신 빨랐습니다. 그리고 이 계기를 통해 앗시리아는 제국으로써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주변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국력이 강해졌기 때문이죠. 여기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고질적인 염화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염화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는 하부에서 중부로, 그리고 상부로 연이어 이동합니다. 이 당시는 아직 중부인 바빌론 일대가 중심지였지만 상부인 앗시리아의 경쟁력이 그만큼 강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관개기술의 발달도 한 몫을 했습니다. 관개기술의 발달로 상부의 농업생산력도 그만큼 높아진 것이죠.기원전 10세기 말, 앗시리아는 중동의 국가중 상대적으로 매우 빠른 시기에 기원전 12세기 대격변의 충격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한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력의 우위를 지니게 되어 확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첫 목표는 맨 처음에서 말한 경제적으로 중요성을 띄던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아타톨리아 동부였죠. 기원전 9세기 중반까지 앗시리아왕들은 그쪽으로 확장정책을 펴서 현재 터키 동남부 국경지대까지 확장합니다. 한편 서쪽으로도 확장을 하여 목재로 유명했던 현재 레바논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죠.이렇게 확장을 한 후 내부정비가 필요했습니다. 이정도의 영토도 당시 중동에서는 엄청난 크기였으니까요. 이것을 주도한 인물이 기원전 858년부터 824년까지 재위한 샬마 네세르 3세였습니다. 샬마 네세르 3세는 현재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당시로써는 혁신적인 통치체계를 만듬으로써 급격히 팽창한 영토를 정비했습니다. 이것이 후대 학자들에게 가장 조명받는 앗시리아의 정교한 통치체계의 첫걸음이 된 것이죠. 샬마 네세르 3세는 영토를 삼분해서 중심부인 앗시리아 일대는 직할령, 주변부는 태수통치령, 최외각은 속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딱 통치할 수 있는 거리에 맞춰서 배분한 것이죠. 그리고 이에 맞춰 행정구역도 만들었고요. 그렇다고 확장을 멈춘 것도 아닙니다. 그의 치세에도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었으니까요. 샬마 네세르 3세의 치세즘에는 바빌로니아까지 복속시키는데 성공합니다.하지만 샬마 네세르 3세 이후 앗시리아는 침체기를 겪습니다. 영토의 변화는 별로 없고 속국의 반란은 끝이 없었으니까요. 덩달아 앗시리아가 임명한 태수들까지 반란을 일으키면서 통치 시스템을 새로 개혁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즉위한 인물이 티그라트 필레세르 3세 였습니다. 기원전 745년부터 727년까지 제위한 티그라트 필레세르 3세는 샬마 네세르 3세가 만든 통치 시스템을 다시 개혁합니다. 행정구역을 쪼개어서 그 수를 2배정도로 늘리고 태수를 군사-행정으로 나누면서 반란의 가능성을 줄였죠. 현대 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시기가 이 시기입니다. 앗시리아의 이러한 통치체계는 이후 나타난 제국들이 계속 쓰게 되니까요.한편 티그라트 필레세르 3세는 1세기 전의 샬마 네세르 3세 처럼 통치체계를 정비함과 동시에 영토확장에 나섭니다. 동으로는 엘람, 동남으로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서로는 이스라엘-유다, 서북으로는 아나톨리아, 북으로는 우라르토를 공격했죠. 그리고 이정도가 사실상 그당시 통신체계를 고려한 영토확장의 한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티그라트 필레세르 3세의 확장이 능력이 되었든 아니든 앗시리아가 자력으로 통치할 수 있는 한계였다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티그라트 필레세르 3세는 더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후 앗시리아의 영토확장은 다시 멈춥니다. 성서에서야 깽판치는 이미지로 계속 등장하지만 의외로 앗시리아인들이 미친듯이 확장은 한 것이 아니니까요. 다만 그들도 반란을 일으키는 속국을 진압할 필요는 있었으니까 이스라엘과 유다가 계속 밟힌 것이고요-_-;; 그렇게 속국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앗시리아는 그 악명높은 강제이주정책도 펼쳤고 이스라엘인들이 그 희생자였죠. 사실 이것도 통치를 원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만; 그리고 반란을 진압한 속국은 상황에 따라 현지인 괴뢰왕을 세우거나 앗시리아의 태수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는 의외로 잔혹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 이미지는 곧 서술할 앗슈르반니팔이 만든 것입니다만-_-기원전 668년부터 627년까지 제위한 앗슈르반니팔은 앗시리아의 왕 중에서 가장 유명한 왕이고, 가장 영토를 넓힌 왕으로 유명합니다만. 실상 상황을 보면 개판입니다. 앗슈르반니팔의 즉위부터가 형제간의 내전으로 즉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앗시리아는 원래 상속분쟁을 막기 위해 왕자들의 순위를 적절히 정하면서 태수로 임명했는데 앗슈르반니팔은 내전으로 갈아엎으며 즉위했고 미친듯이 확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토는 넓어졌죠. 이미 나일강 델타인 하부 이집트를 차지했었던 앗시리아는 상부 이집트까지 정복은 성공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강조했던 그당시 통신체계의 한계를 벗어난 정복이었고 앗슈르반니팔의 즉위부터 내전으로 개판이었으니 이는 곧 파멸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요.앗슈르반니팔 사후 앗시리아는 반란에 시달립니다. 그것을 이끈 것이 메소포타미아 중부의 바빌로니아였죠. 사실 바빌로니아는 그 전부터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었습니다. 근데 그것은 잔혹한 통치체계보다는 오히려 북부 야만인에게 문명인인 우리가 지배당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 크게 들어간 것이었다는게 페이크랄까요? 하지만 앗슈르반니팔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지만 결코 일반화 될 수가 없는 앗시리아식의 통치를 보여줬고 속국에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의 연합군이 니네베를 함락하면서 앗시리아 제국은 멸망했죠.이렇게 앗시리아는 멸망했지만 웃기게도 멸망시킨 당사자인 신-바빌로니아의 상황을 보면 사실상 앗시리아 제국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지와는 다르게 신-바빌로니아가 더 잔인한 편이었죠. 앗시리아의 강제이주는 인구가 부족한 앗시리아 지방에 입식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했지만 바빌론 유수로 유명한 신-바빌로니아의 강제이주는 바빌로니아의 농업생산성은 충분하지만 걍 반란이 귀찮으니 재입식한 것이 크걸랑요. 그래서 앗시리아의 경우는 강제이주를 해도 인구를 섞어버리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해 사마리아인이 탄생했지만 신-바빌로니아는 걍 비웠습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인들과 달리 유대인은 짬뽕화를 피할 수가 있었고요.여기서 첨언을 하자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직할령-태수-속국의 통치체계가 그당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히타이트를 예로 들어보면 히타이트는 그 넓은 영토에도 불과하고 지배방식이 참 원시적이었습니다. 조약을 만들어서 약속을 지키자는 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조약을 맺은 지역중 하나인 트로이가 독립해도 그냥 내비두는 그런 시츄였습니다. 즉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앗시리아라는 제국이 300년간 계속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잔혹한 정복과 통치가 아닌 그 시대에는 매우 혁신적이었던 통치체계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야겠습니다.'Dung--[세기의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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