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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펠로폰네소스 전쟁
    Dung--[세기의전쟁] 2015. 2. 26. 15:41

    페르시아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였던,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아테네의 '영광'은 최고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아테네는 도시국가가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맹주로서 그리스·소아시아·지중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어 '아테네 제국'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그리고 지중해 일대에 걸친 아테네의 '영광'이 현상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테네의 '영광'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강자 스파르타가 존재하고 있는 한, 언제 어디에서 어떤 위험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네의 '영광'에 도취되어 그리스 동쪽의 강국 이집트는 물론 서쪽의 강국 시칠리아와 카르타고까지 정복하자는 아테네인들의 주장에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이유도 바로 스파르타 때문이었다. 스파르타가 존재하는 한 아테네의 영광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동맹관계(실제는 종속관계) 역시 결코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테네가 외부로 눈을 돌리는 순간, 아테네의 '영광'은 동맹국가들의 반란과 스파르타의 공격 앞에 무너질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영광'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테네의 세력을 그리스에 묶어 두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아테네의 찬란한 영광을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아니면 둘 다이거나), 페리클레스는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싼 스파르타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페리클레스가 당시 스파르타와 맺은 30년 간의 휴전협정 역시 그가 스파르타와 항구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여유를 갖고 전쟁 준비를 할 수 있는 기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가 많은 아테네인들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를 벗어난 정복 전쟁을 그토록 반대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하겠다. 그래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모든 부분에 걸쳐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는 모든 역사 교과서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까, 여기에서 다시 거론하는 건 매우 따분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둘 중 어느 하나가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의 절대적 우위를 갖지 못하는 한, 이들의 전면적인 충돌은 단지 '시간문제'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정치체제, 민중들의 기질과 성향이 너무나 판이하여 도저히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포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동맹국들의 문제를 놓고 벌였던 심각한 분쟁은 양국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에 대한 패권의 야망을 똑같이 품고, 서로의 힘을 두려워하면서 또한 강력한 적대의식을 갖고 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결국 타협을 거부하고 전쟁에 돌입한다.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이에 대해 아테네인들이 페리클레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후통첩을 거부함으로써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펠로폰네소스는 스파르타가 위치하고 있는, 아테네의 서쪽에 있으면서 지중해를 향해 돌출한 반도의 이름이다. 그래서 스파르타와 그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국가의 사람들을 펠로폰네소스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스파르타가 맹주가 되어 이끄는 도시국가들간 연합을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고도 불렀다. 전쟁은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동맹(소위 아테네 제국)과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간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이름은 다분히 아테네의 입장을 담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자면, 아테네를 맹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제국에 맞서 싸운 전쟁의 이름이 페르시아 전쟁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이름에는 그리스인들이 적국 페르시아와 치른 전쟁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이름은 아테네가 적국인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인(혹은 동맹)과 치른 전쟁이라는 뜻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비록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과 아테네는 쇠퇴하고 새롭게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지배자로 부상하지만, 그래도 역시 고대 그리스 역사의 중심은 아테네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한다.

    아테네의 영광을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맞수 스파르타와의 전면전까지 결심한 페리클레스가 세운 전쟁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장기 소모전'이었다. 즉 플루타르크가 전한 대로,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동맹의 6만 대군과 아테네의 운명을 걸고 결전을 감행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스타르타의 중무장보병은 당시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의 최대 강병이었다. 페리클레스는 대신 도시의 중심을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 요새가 되다시피 한 아테네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농성전()'을 벌이기로 했다. 여기에는 당시의 공성 기술로는 아테네의 장벽을 꿰뚫을 수 없다는 자신감과 또 장벽 바깥 지역을 스파르타가 봉쇄한다 하더라도 아테네인들은 요새화한 항구를 통해 얼마든지 식량을 수급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농성전과 함께 페리클레스가 생각한 또 하나의 전략은 막강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해상에서 스파르타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이러한 양면 전략을 통한 '장기 소모전'에서는, 결국 인원과 물자가 풍부한 아테네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이 전략은 아테네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아테네인들은 이 전쟁 전략을 비겁한 행동이라며 비판했으며, 페리클레스에게 비겁한 장군이라느니 나라를 스파르타의 손에 떠넘기려고 한다는 등의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전쟁 전략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던 페리클레스는 그 어떤 야유와 조롱 그리고 반대파들의 정치적 공격에도 굴하지 않았다. 도리어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전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자신이 세운 전략에 따라 해군선단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보내 그곳의 도시들을 파괴해버렸다. 따라서 전쟁의 초기 양상은 페리클레스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듯 보였다. 즉 펠로폰네소스동맹군은 아테네 도심을 제외한 전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해전에서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페리클레스가 처음부터 예측한대로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을 오래 끌지 못하고 곧 물러날 듯했다.

     

     

     

     

     

     

    그러나 그토록 치밀한 전략가였던 페리클레스도 전혀 예측조차 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정세 판단과 정치적 능력이 아무리 탁월해도 '운'과 결합하지 못한다면, 국가를 얻지 못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페리클레스는 '농성전'을 위해 아테네 도심 바깥의 농촌지역에 사는 아테네인들에게 집과 농경지를 버리고 아테네 시내로 들어오게 했다. 바로 이것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즉 개전 1년 만에, 아테네에 전염병이 발생해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바람에 수많은 아테네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한다. 전염병이 돈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테네 시로 몰려 들어와 생활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피난민의 주택과 위생시설을 적절하게 마련치 못한 정책적 실수까지 겹쳐, 끔찍하게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게 된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이로 인해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아테네인들이 전염병의 원인이 페리클레스 때문이라고 불평했을 뿐 아니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조직했던 펠로폰네소스동맹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적인 불행까지 겹쳐 다가왔다. 페리클레스의 누이와 친지, 친구들 그리고 정치적 동지와 측근들이 전염병으로 그의 곁을 떠나갔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 아들 파랄우스까지 죽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자신도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고 만다.

    그의 죽음과 함께 아테네의 국운도 급격하게 쇠퇴해갔다. '절대 권력자'라고 살아생전에 페리클레스를 그토록 비난했던 아테네인들 가운데서도 그의 권력이 아테네를 굳건하게 지켜준 기틀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과 함께 아테네는 정치적 혼란과 부패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함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패는 이미 판가름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가 그토록 지키고자 노력했던 아테네의 영광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그때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강자 스파르타의 '영광'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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