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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와 히타이트 전쟁(카데시 전투)Dung--[세기의전쟁] 2015. 2. 24. 12:01
위대한 두 제국
이집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피라미드를 보고 놀라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된 쿠프의 대 피라미드에 케프렌,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가 합쳐진 위용은 고대인들은 물론 현대인들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라미드를 본 관광객들은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을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놀란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돌산의 벽면을 깎아 만든 아부심멜 신전의 정면은 파라오의 모습을 한 4개의 거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각 조상은 높이가 20미터, 얼굴의 귀에서 귀까지의 거리가 4미터, 입술의 폭이 1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기 때문이다. 정면 조각 뒤로 돌산을 파서 만든 신전은 매년 춘분과 추분에 아침의 햇빛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양신과 파라오의 조상을 환하게 비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신전을 건설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인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이집트의 최절정기로 일명 ‘제국 시대’라고 불린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이집트 및 오리엔트 지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던 이집트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히타이트가 양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이집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강력한 히타이트. 두 제국 사이에 거대한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카데시 전투이다.
히타이트
19세기 중반까지 히타이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국가였다. 히타이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8년에서 1892년에 걸쳐서 독일의 고고학자 루우샨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이 터어키의 동남단 진지르리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발굴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핫투사스라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다. 핫투사스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이 해독되고서야 비로소 히타이트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에 현 터키 지역을 통일한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의 수도를 키질강 만곡부의 중심 지점으로 옮기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핫투사스(Hattusas)라고 명명(命名)했다.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을 핫티 왕국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핫티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지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히타이트 왕국이라고 부른다.
히타이트는 점차로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530년경에는 무르실리시 1세가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진하여 함무라비 왕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실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자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 통치를 단념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왕은 암살된다.
그 후 1세기 반 동안 침체해 있던 히타이트는 기원전 15세기 후반부터 1세기 동안 인접 지역의 강국 미탄니와 격렬한 전투를 계속한다. 히타이트의 동쪽에 위치한 미탄니가 가장 번성할 때는 미탄니 군이 히타이트의 영토 내에 깊숙이 침입하여 간신히 수도 주변만 부지할 때도 있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슛필룰리우마시 1세로 그는 수도에 거대한 성을 쌓아 본거지를 튼튼히 하고 후방 지역의 여러 소국과 동맹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배제한 다음 미탄니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주효하여 미탄니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그곳에 친(親) 히타이트 정권을 수립하여 동부의 방위를 철저히 하였다.
이때 히타이트와 맞설 수 있는 국가는 남부의 이집트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세력권은 가나안까지 미치고 있었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정복하자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국경에 접하게 되었고 두 대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람세스 2세는 통치 초기에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로부터 남쪽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그를 추후에 이름이 붙는 ‘건축의 대왕’으로만 놔두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히타이트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라도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이집트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국경과 마주치고 강력한 제국 히타이트와 전쟁의 대 서사시이자 기록으로 남겨진 전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카데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재위 5년 여름에 피람세스(세티 1세가 델타 동부에 세운 도시)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기의 앞부분
카데시 전투의 상상도
카데시 전투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 대국에서 가장 많은 장병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투로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는 전차병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만 5천 명이나 동원했다.
람세스 2세는 직접 5천 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였고 역시 각각 5천 명으로 구성된 라, 프타, 세트로 이름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람세스 2세오는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 지대에서 멈추었다가 북쪽에 있는 샤브투나라는 도시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있었다.
이때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의 아주 멀리 있는 알레포 부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한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의 사단은 매우 뒤 처져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투항한 베두인의 정보로 보아 적은 매우 멀리 있었으므로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두인은 무왓탈리시가 보낸 첩자였다. 히타이트 군대는 실제로 람세스 2세와 지척인 카데시 북동쪽 성채 안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발(後發)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전차병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라 사단을 급습하였다. 레 사단이 히타이트 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무왓탈리시는 곧바로 람세스 2세가 지휘하는 아몬 사단을 공격했다. 이 급작스러운 공격으로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인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 장병들을 독려했다. 다행하게도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파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외인 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로,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가 미리부터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 2세는 오히려 공격으로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낸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무왓탈리시는 자신의 군대가 쫓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만 8천 명에 달하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무왓탈리시의 이 이상한 조치를 이미 이집트 군의 일부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협약으로 끝나는 외교를 예상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즉 자신의 목적은 달성한 데다가 이집트를 궤멸시킨다고 해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왓탈리시는 양국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이집트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선 현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까지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동쪽에는 아시리아가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아시리아가 공격해 오면 전선이 길어져 양 지역을 방어하기에 힘들므로 차라리 이집트와 협정을 맺어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가 있다. 우선 람세스 2세는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을 건조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 즉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멜, 라메세움 같은 여러 대신전과 누비아에 있는 두 개의 성소, 즉 아부심멜 대신전과 데르 대신전의 벽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이 벽화는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람세스의 공적과 전사들의 전투 장면으로 활기가 넘치는 구성은 고대의 상투적인 전쟁화(戰爭畵)와 비교해 볼 때 혁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부의 부조 벽화는 전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고,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 장군의 기록과 같다.전투의 전말
카데시 전투는 양쪽 군대의 전략과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전투였다. 전투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는 이 군사보고서는 전투에 직접 참전한 병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도 최초이다.
꼼꼼하게 기록된 날짜들을 계산해 보면, 이집트 원정군이 카데시 근처에 도달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람세스 2세는 피람세스를 출발하기 전에 이미 여러 곳에 전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히타이트 군에 언제든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카세시 전투에서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기록이 역사적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쟁이지만 전쟁의 결과는 그가 설명한 것과는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람세스 2세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실 유사 이래 한 쪽이 철저히 패배하여 완전히 그 민족이나 국가가 소멸되기 이전에는 전쟁의 결과는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므로 과거의 전투 기록의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카데시 전투만은 승리자라고 적은 이집트의 기록만이 아니라 패배자라고 적힌 히타이트 측의 기록도 있으므로 전쟁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학자들은 양측의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결과 카데시 전투에서 람세스 2세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완패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시리아의 중부와 북부를 히타이트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승리했다면 당시 역사상 최대의 전투 현장을 히타이트에게 내어주었을 리가 없다. 또한 람세스 2세가 이집트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간 전리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전리품도 주로 적의 시체에서 걷어낸 무기와 말 따위가 전부로, 이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람세스 2세가 곧바로 후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투 장비를 보아도 보면 히타이트가 이집트보다 월등하였다. 히타이트는 당시 철로 된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는 이와 반대로 청동제의 무기를 사용했다. 히타이트의 하튜샤 제철소에서는 상질(上質)의 철제 무기, 갑옷, 철제 기구 등을 생산했다. 철제 무기가 청동제 무기를 가진 이집트군을 괴롭혔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다.
특히 히타이트의 가장 큰 무기는 전차(戰車)는 일반적으로 마부 1명, 사수 1명, 전투병 1명이 타고 전광석화와 같이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집트군은 한 전차에 두 사람씩 탔다. 대부분이 장교인 전차 주인 한 사람과 마부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시 히타이트는 3만 여명의 상시군(常時軍)이 있었다.
이와 같이 카데시 전투의 진상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기록에 걸 맞는 히타이트의 기록 역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이 발견된 것은 고고학 사상 가장 믿기 어려운 우연과 행운 때문이었다.최초의 국제 조약
1906년에 베르린 대학과 콘스탄티노플의 오토만 박물관 공동 발굴팀은 터키의 보가즈코이(Bogazk?y)에서 히타이트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발굴에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로 적힌 판을 발굴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빈클러 판(tablet Winckler)이다.
이 판은 기원전 1270년,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핫투시리 3세(Hattushili Ⅲ)가 맺은 평화협정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협정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육로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3천 년 이상이나 경과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된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협정이 맺어지게 된 원인은 물론 카데시 전투 때문이다. 카데시 전투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두 나라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
놀랍게도 이 협정의 조문은 현대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협정의 이름은 ‘위대한 왕, 이집트 국왕이며 용자인 람세스와 히타이트 국의 위대한 왕 핫투시리 사이에, 좋은 평화와 위대한 왕자에 적합한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조약’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히타이트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핫투시리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씀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힛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 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은으로 된 탁자에 기록하며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조약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아 그 나라와 신하들이 멸망하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라고 적혀 있다.
이후 양국은 자신들의 조약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협정의 방법으로 히타이트의 공주가 이집트로 출가하여 람세스 2세와 결혼했다. 또한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와 히타이트의 왕비인 푸두케파도 소식을 교환했고 서로 교환 방문도 했다.전투 이후
람세스 2세는 제위에 오른 지 몇 년이 안되어 카데시 전투라는 거대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 후에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무려 67년이나 되었지만 국내외로 아무런 문제점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안정된 통치 기간을 이용하여 대규모 건물들을 건설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부심멜 신전이다.
1959년에 이집트에서 아스완댐을 건설하자 아부심멜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유네스코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의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동참을 요청하였고 50여 국가들이 참여하는 구난 작업이 펼쳐졌다.
계획은 단순하여 아스완댐이 건설되더라도 수몰되지 않도록 위쪽으로 65미터를 옮기는 것이었다. 람세스 2세의 좌상과 강 양쪽에 위치한 2개의 사원을 고지대로 옮기기 위해 석조물을 1천 개 이상으로 절단한 후 이를 운반하여 원형대로 복원하는 대역사(大役事)였다. 유적을 이전시킬 대상 지역도 원래 유적이 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이 사업은 인류 문화재를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지킨 좋은 예로서, 현재도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적으로 보호해야 할 문화 유산을 지정하여 관리 및 후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람세스 2세가 67년이라는 장기 집권을 하고 무려 110명이나 되는 자손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4명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도 화제 거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친 결혼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파라오는 인간이자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평민과는 결혼할 수 없었으므로 파라오와 가장 가까운 근친과 결혼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록상 람세스 2세는 역사상 가장 먼저 전투의 승패에 대해 거짓말을 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 중에서 람세스 2세를 비난하는 사람이 비교적 많은 것은 그가 전쟁의 승패를 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며 또 신이 사는 세계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부 국가나 위정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조작하는 데 서슴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조작하지는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조작하거나 가필을 하지 않고 모두 지웠다. 그들은 수많은 신전에 새겨진 이름이나 그림의 경우 얼굴을 지우거나 이름을 삭제했는데, 현재 이집트의 유적에서 이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람세스 2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건축물을 새로 지으면서 자신의 선조가 건설한 건축물의 재료를 다반사로 빼냈다. 그것은 자신의 건축물을 보다 쉽게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영국인 고고학자 퀴벨은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아누비스의 지성소에서 빼내 온 기초 벽돌 층을 발견하여 하셉수트가 재료를 도둑맞은 지 3,000년 후에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람세스 2세가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에서 선조의 이름을 지우고 마치 자신이 건설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점이다. 소위 역사를 가필하여 조작한 것이다.
람세스 2세는 과학이 현대와 같이 발전하여 자신의 만행이 발각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람세스 2세의 미라가 살아난다면 무슨 말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카데시 전투의 벽화도
솔직히 카데시 전투는 아직까지 누가 이겼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득과 손실 등을 따졌을때 과연 누가 이전투에서 이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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