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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토만 제국: 발흥과 영토의 확장
    Dung--[세기의전쟁] 2015. 2. 26. 16:55

    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에 걸쳐 11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셀주크 제국을 건설한 투르크계 오구즈 부족은 당시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비잔틴 치하에 있던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중부 동부)로까지 침입하여 이들 지역에 새로운 셀주크 국가를 건설했다. 투르크 군은 1071 만지커트(아나톨리아 동부 끝자락에 있는 소도시) 전투에서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1세를 생포하는 대승을 거뒀고 비잔틴 영토를 계속 잠식해가면서 소아시아 전역에 걸쳐 세력을 확장할 있었다.

     

    투르크 부족들은 11세기 전후해서 몇몇 국가들을 형성했고, 이들은 역사의 흐름을 문명권 바깥에서 놀던 유목민 전사(戰士) 세련됐으나 문약하기만 정착민 사회 간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파악했던 이븐 칼둔의 역사발전 패턴을 그대로 밟게 된다. 투르크 지배 엘리트들은 사나운 유목민 침략자였다가 편안한 도시 생활에 길들여져 세대를 거치지 않아 주지육림에 탐닉하는 약해빠진 상류층으로 전락하여 결국 중앙아시아 평원에서 몰려들어온 다른 도전자인 몽골군에게 어렵게 차지했던 영토를 쉽게 내주게 것이다.

     

    몽골 침략으로 셀주크 집권세력은 하루아침에 파괴되어 버렸고 아나톨리아에서 정치구도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에서 다시 유목민 전사 사회와 소규모 독립국가들이 공존하는 11세기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몽골의 서진(西進) 쫓겨 아나톨리아로까지 이동을 하여 정착한 다수의 투르크 부족들 가운데 에르투그룰(사망년도 1280년경) 그의 아들 오스만이 이끄는 작은 부족은 나중에 가서 다른 투르크 부족들을 규합하여 대제국을 형성하는 단초를 만들게 된다.

     

    오스만은 1326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 부르사(오늘날 이스탄불에서 직선거리로 100km 남방에 위치) 점령하고 1345년에는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갈리폴리에 교두보를 형성한 이곳으로 투르크계 전사들을 속속 불러들인다. 이를 통해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서부 발칸반도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 서부 발칸지역에서의 오토만 세력 확립은 1389 코소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오토만은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했던 티무르의 침입(1402) 같은 앙카라 전투에서 베야지드 1 생포(후에 옥중 사망) 인해 일정기간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아나톨리아 투르크 부족들을 통합하고 발칸반도 북서부 세르비아까지 오토만 영역을 확장할 있었다.

     

    결국 1453 메흐메드 2 때에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함락시키는 역사상 중요한 획을 긋게 되고 옛날 로마제국의 영역까지 이어받게 된다. 이로부터 오토만은 발칸반도 거의 전역을 수중에 넣는다. 이런 오토만의 세력확대는 과거 비잔틴 제국의 관료들과 기독교계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고 오토만 지배자들은 발칸반도에서 그리스계 정교 교회를 후원함으로써 발칸 거주자들의 지지를 받아낼 있었다.

     

     

     

     

     

     

     

     

     

    종교적 관용주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토만 지배사회 확립은 거주민 대부분의 무슬림화를 가져왔던 반면, 발칸지역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지역에서 오토만 지배는 지역주민들의 이슬람화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유는 투르크족 이동이 대부분 아나톨리아에만 집중됐을 발칸반도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오토만 지배자들의 지역 공식정책이 기독교 교회를 지원해주고 이를 통해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오늘날 어떤 학자들은 봐라, 과거 역사를 통틀어 이슬람 지배자들이 종교신자들에게 얼마나 괸대했는지. 코란에는 종교에는 강요란 있을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무슬림 통치자들로부터 오토만 술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배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따라 기독교인, 유태교인, 조로아스터교인 타종교 신도들에 대해 일정한 세금(‘지즈야라고 불렸다) 내면 자신들의 커뮤니티 내에서 자치를 보장받고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있게 했다. 얼마나 관용적이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관대함은 이슬람의 교리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행정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쪽이 정확하다고 있다. 바로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오토만 제국의 통치자들은 중앙아시아 평원에서 달리던 출신으로서 과거 사막에서 일어나 대제국을 형성했던 아랍인들과 유사하게 행정에는 젬병이었다. 아랍통치자들은 그래서 행정관료들을 주로 페르샤 출신으로 채웠던 것이고 오토만 통치자들은 그리스나 다른 발칸국가들로부터 그런 인력을 충원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가 세수(稅收) 걷어들이는데 있어서도 종교적 관용정책은 유용하게 작용했다고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무슬림 주민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세금을 걷지 않았고 따라서 국가를 운영하려면 세금을 징수할 있는 비무슬림 인구(딤미 “Dhimmi”라고 불렀다) 항상 필요했다. 지역을 정복한 세대가 지나면 개종을 강요하지 않더라도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국가 입장에선 세원(稅源)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는 그렇게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오토만 제국의 경우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도모해서 새로운 비무슬림 인구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국가시스템의 존립기반이 위태로워진다는 구조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이는 오토만 제국 쇠퇴의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더 자세하게 언급하기로 하겠다.

     

    * 위와 같이 이슬람에 대해 어떻게 보면 비판적인 듯한 얘기를 하면 어떤 독자들은 누구 편이냐? 혹시 기독교인 아니냐?” 식의 공격을 하곤 한다. 이는 필자가 지레 짐작으로 하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얼마 에피소드에서 이슬람에 대해 약간은 비판적인 언급(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것에 대해 중동권에서 공부를 독자의 항의성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세상에 누가 글을 읽을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꼼꼼하게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분명히 말하건대 누구 편을 들려고 없는 시간을 들여 괜히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종교에 대해서(종교 뿐만 아니라 세상에 어떤 것에 대해서든) 배경과 역사를 설명할 찬양 일변도로만 서술을 하면 그건 용비어천가나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식의 아부밖에 되지 않는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 종교와 이슬람 사회의 역사를 이에 대해 거의 지식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데 있다.


     요즘 한국 내에서 벌어지는 진보 보수 간의 충돌에서도 있다시피 입장에 속한 사람이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의 의견교환 속에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재확인 재생산 하기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비판적, 무조건적 찬양은 마디로 말해 지적인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과의 대충돌

     

    1453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발칸반도 전역의 정복은 오토만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제공한다. 오토만제국 동부에서 수니-시아파 간의 대립으로 페르샤 사파비드 왕조와 관계가 악화되다가 16세기 초에 제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고 결국 전쟁은 오토만의 승리로 돌아가게 된다. 찰디란전투(1514)에서의 승리를 통해 오토만은 아나톨리아 동부와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북부, 그리고 타브리즈(이란 북서부), 알레포(시리아), 부르사(터키 서부) 중요한 교역통로 도시들도 확보하게 된다.

     

    1516-17년에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제국을 격파하고 메카, 메디나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 성지(聖地)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오토만은 전세계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칼리페이트지위를 차지하고(오토만의 칼리페이트 지위는 이때부터 케말 아타튀르크가 제도를 공식 폐지한 1924년까지 400 넘게 계속됐다) 유럽문명과의 대충돌에서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오토만은 이에 더해 인도양에서 벌인 포르투갈과의 해상무역로 쟁탈전에서도 해군력의 우위에 근거하여 압도를 있게 된다.

     

     

    그러나 오토만 통치자들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은 뭐니뭐니해도 유럽의 왕국들과 대치를 벌이던 서부전선이었다. 오토만 통치자들은 스페인의 합스부르그제국등 유럽의 강자들과 수백 년에 걸쳐 부단한 전쟁을 벌여(대표적 예를 들자면 1520 베오그라드 점령, 1529 비엔나침략, 1683 2 비엔나 침공, 1529 알지에전투, 1534 튀니스전투, 1571 레판토해전 ) 쌍방간의 전선은 유럽대륙이나 지중해상에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레판토 해전(H. Letter, Wikipedia)

     

    오늘날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1517 레판토(그리스)해전을 무슬림 오토만제국에 대항한 기독교 유럽세력의 승리 대전환점이라고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로도 오토만의 승리는 숱하게 많았다(예를 들어 1574 오토만에 의한 튀니스의 재탈환). 아무튼 1580 지중해전쟁은 막을 내리고 당시 평화조약에서 그어졌던 합스부르그와 오토만 간의 세력 분계선은 지금까지도 기독교와 무슬림 문명권 간의 분계선으로 남아있게 된다.

     

    유럽 북부(흑해 북부 해안과 코카서스 지역을 포함)에서 오토만은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르던 러시아와 맞서지만 결국 대결은 러시아(나중엔 폴란드까지 합세) 승리로 끝나고 오토만의 북진(北進) 흑해 북부 해안 부근에서 머물고 말게 된다. 유럽과 러시아 전선에서 이상의 진군이 막혀버렸다는 것은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기반이 위태로워지는 오토만제국에 있어선 치명적인 국력 쇠퇴의 원인이 됐던 것이다.

     

    자니사리 가지

     

    이집트 맘루크 군사정권과 유사하게 오토만 지도자들은 부족(部族) 군벌들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종의 노예군대인 자니사리 양성했다. 이들 군대를 채우는 병사들은 초기엔 포로나 지원병으로 충당했지만 점차 발칸반도에서 차출한 어린 노예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보통 자니사리 병사로 차출되는 방식은 기독교인 커뮤니티 내에서 건장하고 체력이 좋은 소년들을 눈여겨봐뒀다가 나중에 데브셔르미(devshirme)라고 부르는 제도를 통해 세금 조로 아이들을 데려가는 식으로 이뤄졌다. 당연히 처음에는 아이들과 생이별을 당하는 부모들 입장에선 억울하고 원통한 노릇이었고 따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갖은 수를 썼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렇게 눈물을 뿌리며 차출되어갔던 아이들이 나중에 훌륭한 교육을 받고 늠름한 청년장교로 자라나서 때로는 오토만제국의 정부 최고위직으로까지 올라가는 일이 속출하자 이들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고 차츰 너도나도 자식을 경쟁적으로 자니사리로 보내려는 부모들이 늘게 됐다.

     

    오토만제국의 자니사리 시스템은 초기엔 신분의 세습을 금지하여 술탄 저항세력을 원천봉쇄 한다는 원래 정신에 입각하여 매우 효과적인 군사조직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만 점차 그런 본래의 설립 이념에서 벗어나 발칸 차출 노예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 접촉을 얼마든지 있게 됐고 신분 세습까지 가능하게 되어 바로 이것이 나중에 오토만 쇠퇴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이런 군사조직에 근거한 오토만 국가조직은 제국 초기부터 번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30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점차적으로 형성됐던 것이다. 이런 발전을 이끌어온 기본동력은 투르크 또는 전사(戰士)계급(이들은 가지 “ghazi”라고 불렸고 주로 지방 군대와 종교행정 분야에서 힘을 발휘했다) 자니사리 세력(중앙정부 제국 유지에서 주된 역할을 맡았다) 간의 갈등이었다고 있다.

     

    세력 간에는 시기에 따라 힘의 균형이 엎치락뒤치락 했지만 15세기 중반 메흐메드 2 가서 자니사리 병사들의 파워를 강화시켜주고 세습귀족들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 전자의 급속한 세력확대가 이뤄질 있었다. 자니사리의 권한은 술레이만 1(1520-66) 시대에 들어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히게 된다.

     

    다음 호에는 16세기 말까지 나가던 오토만제국이 급속하게 쇠퇴하면서 나중에 19세기 말에는 유럽의 환자’(the sick man of Europe) 취급까지 받게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와 함께 오토만제국 특유의 군사충원 제도였던 자니사리시스템이 제국의 쇠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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