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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로마 전쟁Dung--[세기의전쟁] 2015. 2. 26. 16:51
헤롯 왕 사후, 유대 식민지 지방은 로마의 총독에 의한 직할지였지만 헤롯 왕의 자손인 아그리파 1세는 교묘하게 로마의
정치를 움직여 서기 41년에 유대왕이라는 칭호를 받는데 성공하여 유대 지역의 통치를 받아냈다. 아그리파 1세가 44년에 병사하자
다시 유대 지방은 로마의 직할지가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피지배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고 로마에 협조적인 통치자를 두어 관리했는데 다신교(多神敎)
문화가 많던 지중해 세계에서 유대 지역은 유일하게 일신교(一神敎)를 신봉하는 문화지구여서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은
한층 높아져갔다.
그 때 유대 식민지의 총독이던 프롤루스는 예루살렘의 도시정비를 위해 그 자금으로 유대인들이 신전에 바치는 보물을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누가복음에선 예수가 세리장 자케오(삭개오)의 집을 방문했을때 민중들이 저 사람은 죄인의 집에서
머무는구나라며 불만스러워 했을 정도로 로마 총독의 세금은 유대인에게 평소 버거운 것이었다.
안그래도 무거운 세금에 불만이 많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과격민족지도자인 시몬 바르 기올라, 기스칼라 요하네,
엘아자르 벤 시몬은 프롤루스의 요구에 이것은 우리의 신을 모독하며 말살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프롤루스는 폭동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역으로 유대인들의 반로마 정서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이에 시리아의 총독이 군단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지만 대규모화된 유대반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사태를 위급하다고 여긴
네로 황제는 장군인 베스파시아누스에게 3개 군단을 주어 진압에 나서게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인 티투스와 함께 출동해 예루살렘을 공략하기 전에 주변도시를 함락시켜 고립을 생각하여
유대 주변도시를 각개격파했다. 이리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반란군을 격파하면서 사마리아 및 갈릴리 지방을 평정하여
예루살렘을 고립하는데 성공했다.
서기 68년 4월에 갈리아 총독이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데크스가 반란을 일으켜 6월에 네로황제가 자살했다. 69년엔 4명의
로마인이 차례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더욱 로마의 정치는 어려워졌는데 게르마니아에서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빌리스를
주모자로 하는 반란이 발발하자 로마는 그야말로 혼란상황에 빠졌다.
베스피시아누스는 이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기 직전에 로마로 되돌아갔다. 로마군은 사령관이 부재인채로 현지에 머물러
유대반란군과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서기 69년 12월에 비텔리우스가 살해되면서 유일하게 로마 황제로 등극한
베스피시아누스는 다시 예루살렘의 함락을 생각하여 티투스에게 공략을 명령했다.
서기 70년에 유대인들은 신전과 안토니우스 요새에서 강하게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로마군에 의해 패배하여
신전은 불에 타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이에 예루살렘의 반란은 진압되고 티투스는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로 돌아왔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이 지금도 남아있는 티투스의 개선문이다. 여기엔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을 가져오는 병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유대 식민지역엔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사후수습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유대인 저항자들을 차례로 진압하고 사해까지
진출했지만 도중에 병사하여 후임으로 플라비우스 실바가 부임해왔다. 72년에 유대인들은 마사다에서 최후항전을 벌였지만
실바가 이끄는 로마 제 10군단에 패했다. 로마군이 마사다를 점령했을때 약 950명의 유대인들은 모두 자결했다.
이 전쟁 후 예루살렘엔 로마군 1개 군단이 상주하게 되었다. 또 이 전쟁은 제 1차 유대 - 로마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재임기인 132년부터 135년에 다시 바르 코크바가 주도한 반란을 제 2차 유대 - 로마 전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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